고린도후서의 배경 (고후 1:1-2)

  • 고린도후서의 배경

  • 고린도후서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 고린도후서가 두 번째 편지는 아니다

 성경 사본들은 고린도후서에 “고린도인들에게 Ⅱ”(Pros Korinthious B)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성경원본에는 이러한 타이틀이 붙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가 더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네 통의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 고린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A.D. 51년 경 고린도를 처음 방문했고, 1년반 동안이나 머물면서 교회를 튼실히 세웠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유대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며 그곳에 머물게 하셨지요. 극도로 타락한 도시 위에 바울은 목숨을 담보로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간 이후 교회는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어지럽혀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이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 하나를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분실되어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내가 너희에게 쓴 것” (고전5:9)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의 교제를 경고하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고전5:9).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의 첫 번째 편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전5:10-11).

 

2. 두 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바울은 글로에 집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에 대한 가슴아픈 소식을 듣습니다 (고전 1:11). 고린도교회가 분파, 음행, 분쟁, 무질서 등의 수많은 문제들로 인해 홍역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만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서도 바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신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고린도교회로부터 받은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 편지, 눈물의 편지

세 번째 편지는 눈물의 편지라 불리는 것으로 현존하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바울은 제 3차 여행 중이었으며,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고린도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너무나도 바빠서 에베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선교 전략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내어 문제들을 해결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사역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연소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이 디모데의 리더십에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오히려 고린도의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죄들이 여전히 그대로 있고, 바울의 권위는 계속 실추되고 있으며, 바울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거짓 교사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급히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고후 2:1, 12:14, 13:1). 짧은 방문이었기에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방문은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여러 골치아픈 문제들을 다루고, 대적자들에 대항하여 변론하며 또한 성도들의 잘못을 책망하기 위한 방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큰 효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도 편에 또 하나의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고후2:4). 이는 엄한 편지라고도 불리고, 눈물의 편지라고도 불립니다. 방황하는 성도들을 향한 목자의 마음을 가슴 절절히 담은 편지였습니다.

 

4. 바울의 네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

에베소에서의 사역이 너무 중요했고 열매도 많았던 터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지낸 후에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갈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행 19:21). 그러나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으로 인해 급히 에베소를 떠나야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인해 우상사업이 무너지자 우상 상인들이 몰려 들어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맹수”(고전 15:32)라고 일컬을 정도로 그들은 무식하고 격렬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 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고후 1:8, 9). 바울은 결국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를 향하였으며, 마게도냐로 향하는 항구인 드로아에서 머물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을 가지고 돌아올 디도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이 원하는 시간 안에 드로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당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고후 2:12-13). 고린도교회에 대해 바울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잘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음에도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걱정으로 평안을 잃어서 전도를 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지체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결국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에 머물고 있을 때에 드디어 디도가 기쁨과 안도의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대부분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에 따라 회개하고 돌이켰고,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으며, 교회는 안정을 되찾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기쁨에 겨워 마게도냐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또 하나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교회가 회복된 증거들은 후에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기록한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중직자중 한 사람이었던 가이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고린도교회에 대해 가졌던 근심과 염려로부터 회복되었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도 성공리에 이루어졌음은 고린도교회의 회복을 말해주는 증거들입니다.

 

5. 회개한 대다수 성도들과 소수의 대적자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교훈을 따라서 교회를 더럽혔던 범법자를 출교시켰습니다 (고후 2:6). 교회는 거룩함과 순결함을 회복하였습니다. 교회는 순결함을 회복할 때 능력을 갖습니다. 이제 능력있는 교회가 되었기에 바울은 심지어 출교된 범법자들을 다시 받아 들이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 역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복은 구제 헌금으로 표현되어졌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는 것이기에, 은혜를 받으면 그것은 반드시 물질로 표현이 되어집니다. 그동안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의 교회들에 비해 구제 헌금에 대한 열정이 뒤쳐져 있었습니다. 교회에 존재하는 악덕과 분쟁과 자기자랑 등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은혜가 회복이 되자 구제에 대한 열정 또한 불타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고린도교회 대부분 성도들이 바울의 권고를 진정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대적하는 소수의 무리들은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12사도가 아니므로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바울이 당초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말을 했다가, 에베소의 사역이 너무 바빠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던 것이 도마 위에 올려 졌습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쉽게 내뱉는 경박한 사람으로 몰아간 것이지요. 그들은 고린도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짓교사들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총 13장인데, 전반부 9장과 후반부 4장으로 나뉩니다. 전반부 9장은 고린도교회의 회복에 대한 감사와 칭찬과 기쁨과 권면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바울의 권면에 순종하고 신앙의 진보를 보인 대다수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고린도전서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4장은 사도권에 도전하고, 거짓 가르침을 일삼는 대적자들을 향해 단호한 경고와 자기변호를 기록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을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합니다.

 

6. 함께 춤추는 교회

고린도교회는 디모데를 연소하다는 이유로 무시했을 뿐 아니라, 영적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바울마저도 무시했습니다. 옛 자아가 아직 살아있었고, 자기 자랑과 자기 주장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애타는 마음으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받아 들여 교회를 더럽히는 무리들을 축출하였으며,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였습니다. 교회 내에는 여전히 바울을 대적하고,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암세포처럼 교회를 병들게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원칙 가운데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문화를 해치는 무리가 있다면 단호하게 교회에서 배척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함께 어우러져 복음의 춤을 출 때에만 공동체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권징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더럽히는 자들에 대한 용납은 사랑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유기 행위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소수의 무리가 아닌 회개하고 돌이킨 대다수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무질서는 현대 교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절대 진리가 인정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넘어,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문화에서도 각 개인이 주인되어야 한다는 세상 사조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조는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집니다. 이는 리더십에 대한 무시와 공동체 의식에 대한 붕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합니다. 섬기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섬김받고 누리려는 사람들만 넘쳐납니다. 그러다 보니 더 잘 대접해 주는 교회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유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섬김 받으려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고 헌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한 영혼을 주님께 되돌리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낮은 자, 섬기는 자,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도가 아니라, 문화센터 회원이겠지요. 바울의 마음에 평안을 잃게 했던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은 현대의 교회와 성도들 속에서 더욱더 악화된 상태로 공동체를 해치는 문제들로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성도로 서있습니까, 대적자로 서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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